복싱의 역사
권투라고도 불리는 복싱의 역사
권투는 주먹으로 싸우는 스포츠로, 말 그대로 주먹싸움과 경품 싸움 , 즉 상/돈을 다투는 싸움이라고도 한다. 복싱은 1904년부터 올림픽 프로그램에 포함되었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누군가 오락과 같은 싸움을 조직할 생각을 하기 전에 그들의 주먹을 사용하여 분쟁을 해결했다.
기원전
권투가 기원전 1500년에 크레타 섬에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현대의 연구원들은 그러한 결투가 아프리카, 특히 현대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그보다 더 일찍 알려졌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4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형문자 경전은 나일 고원과 이집트 전역이 에티오피아를 정복한 이후 이 스포츠의 인기를 보여주었다. 지중해 지역과 중동을 통한 이집트 문명의 향상은 권투의 영향력을 확산했다. 기원전 686년에 복싱은 올림픽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하지만, 고대 복싱은 오늘날 우리가 존경하는 스포츠와 거의 닮지 않았다. 모든 싸움은 관중들이 생활무대를 형성하는 공개적인 플롯에서 진행되었다. 그 싸움은 보통 상대편 중 한 명이 중상을 입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첫 권투 선수들은 주로 영광을 위해 싸웠지만, 우승자에게는 금, 가축 또는 다른 전리품도 주어졌다.
손목과 손을 보호하기 위해 선수들은 주먹을 땋았고 때로는 가늘고 부드러운 가죽 끈으로 팔뚝의 3분의 2를 땋기도 했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끈은 더 단단한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팔 보호 장비로서뿐만 아니라 주먹을 일종의 공격 무기로 만들었다. 이후 로마 제국에서는 가죽끈에 검투사들의 싸움에 사용되는 특수 구리 및 철제 받침대를 장갑을 끼었는데, 보통 전사들 중 한 명이 죽으면서 끝이 났다.
기독교의 확산과 로마 제국의 붕괴로 주먹 싸움은 오락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수세기 동안 잊혔다. 첫 번째 공식 시합은 1681년에 영국에서 등록되었다. 그리고 1698년부터 정기적으로 예정된 권투 경기가 런던의 왕립 극장에서 열렸다.
점차 런던은 명성, 영광, 돈을 추구하는 지방 권투 챔피언들의 중심이 되었다. 바로 그 이유가 특히 런던의 권투 발전을 위한 동기부여였다. 그 경기에서는 각 권투선수의 보수와 관중들이 도박을 한 지분의 비율이 결정되었다. 선수들은 장갑을 사용하지 않았고 일반적인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체급 분류가 결정되지 않아 챔피언이 한 명만 발표되었다. 경량급 권투선수들은 종종 구타를 당했다. 라운드가 결정되었지만, 싸움은 보통 상대팀 중 한 명이 싸움을 계속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대 선수가 땅에 떨어진 뒤에도 공격을 하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다. 이러한 조건들은 16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다.
복싱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었다. 1719년, 대중이 가장 좋아하고 많은 권투 경기의 승자인 제임스 피그가 잉글랜드 챔피언으로 선언되어 15년간 타이틀을 지켰다. 제임스 피그의 추종자 중 한 명인 잭 브라운톤은 당시의 주먹다짐에 가까운 경기를 실제 운동경기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1743년 잭 브라운튼은 첫 번째 규칙 강령을 썼고, 그 규칙들은 사소한 수정으로 1838년까지 사용되었는데, 그때 업데이트된 "런던 상금 링 규칙"으로 대체되었다. 권투선수들은 손만 사용할 수 있으며 허리 아래로 펀치를 날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브라운톤의 규정에 따라, 싸움은 선수들 중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어 링에 진입해 상대와 1야드 범위 내에서 스탠스를 잡을 수 없다면 패자로 간주됐다.
상대에게 얻어맞은 후 펀치를 날리는 것은 금지되었고, 핸들러는 상대와 마주보고 광장의 한쪽에서 그를 제자리에 앉히는 데 30초가 걸렸다. 잭 브라운튼은 복싱의 아버지로 인정받았다. 그는 추종자들을 지도하기 위해 훈련 체육관을 열었다. 그는 또한 권투선수들의 손과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최초의 권투 장갑인 머플러를 발명했다.
잭 슬랙이 브라운튼을 이겼을 때, 챔피언 타이틀을 위한 싸움은 더 규칙적이 되었다. 이 복싱은 특별한 것으로 매력을 잃었고, 다니엘 멘도자와 존 젠틀맨 잭슨과 같은 선수들은 여전히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이 스포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약간 줄어들었다.
다니엘 멘도자는 몸무게가 76kg로 강하고 빠른 왼쪽 펀치가 주 무기였다. 멘도자를 이긴 후, 잭슨은 권투의 존경을 더 많이 주는 재정적인 자격 모델에 기여했다. 1814년, 런던에서는 복싱 협회가 설립되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런던상 반지 규칙은 1838년 그 협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 규칙들은 1838년 제임스 데프 잠 넷이 윌리엄 벤디고와의 싸움에서 잉글랜드 챔피언 타이틀을 잃으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톰슨.
그 싸움은 양쪽에서 두 개의 밧줄로 묶인 24피트 링 위에서 진행되었다. 선수 한 명이 링 바닥에 떨어지자 라운드는 끝났다. 당시 부상한 권투선수는 30초간의 휴식시간 동안 링 구석에 앉아 있었다. 30초간의 휴식 후, 상대팀은 링 중앙에서 스탠드를 잡고 다음 라운드가 시작될 것이다. 상대 중 한 명이 8초 안에 링 센터에 들어가지 않으면 나머지 한 명이 우승자로 선언됐다. 욕설, 시비, 머리와 다리로 때리고, 반지 위의 허리 아래를 때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 모든 행동들은 링 싸움 중에 부적절하다고 주장되었다.
퀸즈베리 법규
퀸즈베리 후작인 존 스졸토 더글라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새로운 퀸즈베리 규칙은 네 가지 주요 영역에서 런던 프라이즈 링 규칙의 규칙과 달랐다.
상대는 패딩 장갑을 끼어야 했다.
라운드는 1분간의 휴식이 필요한 3분간의 싸움으로 계속되었다.
손을 사용하는 것 외에 다른 종류의 싸움은 금지되었다.
링 바닥에 닿은 권투선수들 중 누구라도 10초 이내에 일어서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맞았다고 주장되어 싸움은 끝이 났다.
그 규칙에는 또한 스포츠맨의 체중 기준에 근거한 분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 새로 채택된 규칙들은 전문가들에 의해 무시되고 무시되었는데, 프로들은 이를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선언하고 런던상 링 규칙에 따라 복싱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많은 젊은 권투선수들은 퀸즈베리 규칙을 선호했다. 제임스 잼 메이스는 1861년 헤비급 복싱 선수들 중 잉글랜드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최초의 스포츠맨이었다. 이런 대회에서 패딩 장갑을 처음 사용한 권투선수 제임스 젬 메이스는 퀸즈베리 룰의 인기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미국의 유명 권투선수였던 존 L. 설리번은 세계선수권이 퀸즈베리 규정에 따라 마련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1889년 헤비급 복싱 선수들 사이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린 런던 교외에서 설리번은 장갑도 쓰지 않은 채 너클바인 복싱을 주장했다.
1889년 설리번은 마지막으로 권투 너클바인 제이크 칼라인을 상대로 헤비급 복서들 사이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방어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 이 규칙은 미국에서 불법으로 선언되었기 때문이다.
그 싸움 이후, 많은 법적 문제들로 인해 설리번은 퀸즈베리 규정에 따라 패딩 장갑을 착용한 제임스 J. 코벳과 챔피언 타이틀을 방어해야 했다.
복싱의 경제
20세기 초에 권투는 아마도 영광과 부를 위한 가장 짧은 방법 중 하나가 되었다. 프로 권투 프로모션의 중심이 점차 미국으로 옮겨갔다. 이것은 주로 미국 경제의 성장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곳에 도착한 수많은 이민자들에 의해 야기되었다.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으로 인해 수천 명의 아일랜드 사람들이 신세계에서 성역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1915년까지 아일랜드 사람들은 프로 복싱에서 지배적인 국가 그룹이 되었고, 테리 맥거번, 필라델피아 잭 오브라이언, 마이크 설리번과 그의 동생 잭, 팩키 맥팔랜드, 지미 클랩 비, 잭 브리튼 그리고 많은 다른 권투선수들을 대표했다.
독일, 스칸디나비아, 중앙 유럽에서 온 재능 있는 권투선수들도 많이 등장했다. 1915년까지 활발하게 권투를 하던 조 초인스키, 아베 아텔, 배틀링 레빈스키, 해리 루이스 등 뛰어난 유대인 스포츠맨들은 바니 로스, 베니 레너드, 시드 테리스, 르윈 들러, 알 싱어, 맥시 로젠블룸, 맥스 바어 등 제2의 권투선수들이 뒤를 이었다. 토니 칸조네리, 로키 마르시아노, 조니 던디, 윌리 펩과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 권투선수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흑인 미국인들은 또한 권투의 최고점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피터 잭슨, 샘 랭포드, 조 월콧, 조지 딕슨은 미국에서 복싱의 전성기에 오른 흑인. 1902년 라이트 그룹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조 간스와 1908년 헤비급 복싱 선수 중 최초의 흑인 챔피언이 된 잭 존슨. 인종차별주의로 인해, 미국 흑인들의 세계 복싱 선수권 대회 참가가 크게 저해되었다. 설리번은 흑인 잭슨을 상대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방어하기를 거부했고, 마나사 마울러로도 알려진 잭 뎀시는 흑인 해리 윌즈와의 경기를 거부했다. 존슨은 피부색 때문에 챔피언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여러 차례 박해를 받은 끝에 미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흑인 복서들의 박해는 1929년의 대공황까지 계속되었다. 1937년 흑인 복서 조 루이스는 헤비급 복서들 사이에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얻었고 가장 유명한 복서들 중 한 명이 되었다. 헨리 암스트롱, 슈거 레이 로빈슨, 아치 무어, 에자드 찰스, 제리 조 울콧, 플로이드 패터슨, 소니 리스톤,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지어도 다양한 체급 그룹에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20세기 마지막 사분기에 흑인 투사들은 다른 권투선수들을 압도했다. 슈가 레이 레너드, 마블러 마빈 헤글러, 토마스 허슨, 래리 홈즈, 마이클 스핑크스, 마이크 타이슨 등이 그들 중 한 명이다.
스페인 역시 카를로스 몬존, 파스쿠알 페레스, 로베르토 듀란, 알렉시스 아겔로와 같은 유명한 권투선수들과 함께 기여했다. 필리핀의 판초 빌라는 1923년 라이트급 그룹에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최초의 아시아 권투 선수였다. 20년대 후반 동아시아는 프로 복싱에서 가장 높은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는 수많은 권투선수들을 선보였다.
아마추어 복싱의 개발
퀸즈베리 규칙의 개발자인 후작 존 스졸토 더글라스는 1867년 최초의 아마추어 복싱 대회를 시작했다. 1880년 아마추어 복싱 협회가 창립되었고 1881년 이후 최초의 정규 대회가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준비되었다. 1888년 미국에서 아마추어 스포츠 연맹이 설립되었고 그 이후로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매년 전국 대회가 개최되었다.
아마추어 복싱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이는 매년, 2년마다 또는 올림픽 경기와 마찬가지로 4년마다 열리는 국제 토너먼트를 준비하는 결과를 낳았다. 유러피언 게임, 커먼웰스 게임, 팬 아메리칸 게임, 올 아프리카 챔피언십, 월드 밀리터리 게임은 아마추어 권투선수들 사이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대회 중 하나이다.
모든 아마추어 대회는 1946년 런던에 본부를 두고 설립된 국제부르테 아마추어 AIBA의 주관 하에 진행된다.
1950년 소비에트 연방은 국제부르세 아마추어 AIBA에 가입했고 1952년 올림픽 경기에 참가했는데, 이 종목에서 소련 스포츠맨들의 수준 높은 프로페셔널리즘이 동독, 폴란드, 헝가리, 쿠바와 함께 시연되었다. 프로 복싱은 여전히 F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쿠바에 있는 카스트로의 정부, 따라서 쿠바 복싱 선수들은 국제 아마추어 복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쿠바 헤비급 선수인 테오필리오 스티븐슨은 1972년, 1976년, 1980년에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 아프리카의 복싱은 50-60년대에 그 대륙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독립된 이후 발전하기 시작했다.
프로 복싱의 관리자 및 스탭들
매니저들은, 자주, 프로 복싱 선수 경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다. 감독은 권투선수들의 체력 및 동기부여 수준을 유지하고 계약 처리, 코칭, 감독, 싸움 준비 등을 담당한다.
주먹다짐 시대에는 최고의 투사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는 후원자가 있었다. 하지만, 권투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떨어지자, 권투 선수들은 돈 문제를 해결하고 권투선수들에게 적합한 상대를 선택하는 전문가들에 의해 참여하게 되었다. 바로 이 기능이 관리자의 주요 업무가 되었다.
훌륭한 경영자는 생각에 잠겨 그의 후견인을 유명하게 만들고, 잘 해낸 일에 대한 보상으로 이익의 일부를 받는다. 가장 성공한 감독들은 종종 권투 챔피언들 자신만큼 인기를 얻는다. 프로모터들은 싸움 계획과 조직, 권투선수들의 초대를 책임지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최초의 저명한 프로모터였던 조지 텍스 리카드는 복싱을 큰 사업으로 바꾼 사람이었다. 1906년, 그가 작은 광부들의 정착지 네브에서 조 간스와 오스카 배틀링 넬슨 사이의 가벼운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위한 싸움을 주선한 후. 골드필드, 그는 프로 권투 경기를 준비하면서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고 권투 대회에 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광고를 전문적으로 이용하는 리카드는 티켓 판매로 인한 수입을 상당히 늘렸다. 권투 시청자를 늘린 권투 경기 중계 아이디어와 팬 수를 가장 먼저 제시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1919년부터 1926년까지 세계 챔피언인 잭 뎀시를 홍보하기 위해 이 다섯 경기에 각각 백만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잭 뎀시의 스포츠 경력이 끝난 대공황의 세월 동안 리카드의 이전 투자로 인한 배당금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 후 1935년 발기인 마이크 제이콥스가 조 루이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큰 수익의 새 시대를 열었다. 루이스의 스포츠 경력 동안 벌어들인 수입은 5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병든 영국 권투선수 중 한 명이 일어서도록 도왔던 영국의 프로모터 잭 솔로몬스는 많은 미국의 선두 권투선수들이 대서양을 건너도록 격려하는 한편 그들은 집에 있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해리 리븐, 미키 다프, 마이크 버렛, 베리 언 등 많은 뛰어난 영국 프로모터들이 솔로몬스의 길을 따랐다.
최근에, 프로모터들은 종종 의심스러운 거래와 언더 테이킹에서 의심을 받는다. 스캔들로 알려진 미국의 발기인 돈 킹과 밥 아룸은 FBI의 긴밀한 수사를 받고 있었다. 킹은 아마도 현대 복싱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것이다. 권투와 그의 권투선수인 타이슨과 차베스를 홍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의 방법과 스타일은 다소 의심스러웠다.
1990년 영국 프로모터 프랜크 워렌의 스포트라이트는 스포츠의 무결성에 대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TV와 프로 복싱
TV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로 권투 프로모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프로 복싱경기 중계방송에 투자해야 하는 자금이 상대적으로 적어 복싱 방송은 다른 종목에 비해 정례화됐다. 프로 복싱 방송에 대한 관심은 1962년 이후 감소했다. 하지만 1976년 미국 복싱선수 5명이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뒤 프로에 입문하면서 권투 경기에 대한 TV 시청자의 관심이 다시 커졌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케이블 TV가 소개되면서 젊은 권투선수들을 지도하고 훈련시키는 프로 클럽이 대거 등장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TV 방송으로 프로 복싱 복귀가 크게 늘었다. 1960년대 중반 슈퍼 헤비급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서 얻은 수백만 달러의 수익은 거래의 일부가 되었다. 복싱의 전설인 무하마드 알리는 20년 동안 6900만 달러 이상을 벌었다.
1987년 4월 6일, 유명한 웰터급 레이 슈가 레너드와 마빈 해글러는 3,000만 달러의 수수료를 나눠 가졌다. TV 방송 외에도 카지노에서 권투 경기 준비를 통해 미국과 유럽의 프로 권투 대중화가 이뤄졌다. 라스베이거스, 애틀랜틱 시티, 뉴저지 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카지노들은 프로 복싱 토너먼트에서 이익을 얻었지만, 이 복싱 쇼들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았다.
프로 복싱 협회
세계 프로 복싱은 아마추어 복싱과 프로 복싱을 모두 통제하는 통일된 조직이 없다.
1920년 미국에서 두 개의 단체가 설립되었다.
미국 권투 협회 – 공공 기관
뉴욕 주 체육 위원회 – 정부 기관
조정기의 공유는 경쟁 기관들이 서로 다른 권투 선수들에게 유사한 타이틀을 수여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유럽에서는 국제복싱연맹이 프로복싱을 관장하는 기구가 되었으며, 1948년 유럽 복싱 연합으로 개편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프로 복싱을 지배하는 통합 협회를 설립하기 위해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세계복싱위원회는 1963년에 설립되었다. 미국복싱협회 1960년대 초 세계복싱협회 WBA로 이름을 바꿨다. 1983년 국제복싱연맹(IBF)이 결성되었고 1988년 세계 복싱기구(WBO)가 활동을 시작했다.
국제복싱기구(IBO)는 1991년에 설립되었다. 독자적인 전산 등급 시스템을 자체 등급으로 채택했다.
체급 분류
권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권투선수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체급 분류에 영향을 받았다. 체중이 더 나가는 권투선수가 체중이 덜 나가는 상대보다 유리하다는 사실이 그런 분류의 근거가 됐다. 무게 분류는 미국과 영국에서 모두 개발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8개의 체급 그룹이 선발되었다.
플라이급 – 50,8kg
밴텀급 – 53,5kg
페더급 – 57,2kg
경량 – 61,2kg
웰터급 – 66,7kg
미들급 – 72,6kg
라이트헤비 – 79,4kg
헤비급 – 79, 4kg 이상.
위의 체급 그룹은 모든 세계 경기와 국가 경기에서 준수해야 한다. 만약 권투 선수의 체중이 그가 대표하는 특정 체급 그룹에서 제공한 체중을 초과한다면, 그는 승인된 기준에 따라 체중을 맞출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가 실패하면 그 싸움은 폐지될지도 모른다. 만약 챔피언 타이틀이 수여된 후, 권투 선수의 체중이 체중 분류에 명시된 체중을 초과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챔피언 타이틀은 그 권투 선수로부터 빼앗길 것이다.
59㎏와 63·5㎏ 등 2개의 추가 체급이 1920년대 미국에 등록됐다. 위의 8개 중량 그룹을 맞출 수 없는 권투선수에게 이러한 중량 분류가 채택되었다.
프로 복싱의 큰 인기는 현재 17 체급이 존재하게 되었다. 세계복싱위원회(WBC)는 권투선수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체중 분류를 도입했다.
크루저급 – 88,5kg
슈퍼 미들급 – 74,8kg
슈퍼 웰터급 – 69,9kg
슈퍼 밴텀급 – 55,3kg
슈퍼플라이급 – 52,6kg
경량 플라이급 – 49,9kg
짚 중량 – 47,6kg
규칙, 장비
프로 복싱과 아마추어 복싱 모두에서 통일된 통제 권한이 없는 한 복싱 싸움의 주선 및 달리기, 복싱 링을 위한 장비와 복싱 선수의 몸매를 위한 장비의 통일된 규칙은 정의되지 않는다. 미국과 다른 나라들은 권투 대회를 위한 그들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권투 대회는 사각 링으로 진행되며, 측면은 5m, 49cm에서 6m, 71cm까지 다양하다. 세 개의 늘어진 밧줄이 고리를 감싸고 있다.
아마추어 복싱 대회를 규제하는 규칙은 전 세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아마추어 복싱 대회를 규제하는 규칙은 전 세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아마추어 복싱 토너먼트는 보통 두 번의 1분 휴식으로 일시 정지한 세 번의 라운드로 나뉜다. 1라운드의 지속시간은 3분이다. 권투 선수는 특별히 장착된 헬멧으로 머리를 보호해야 한다. 심판은 보통 토너먼트 규칙을 어떻게 준수하는지를 통제한다. 아마추어 토너먼트에서의 채점은 보통 3~5명의 심판들이 링 가까이에 서서 누가 우승자인지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아마추어 복싱 대회 룰은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
아마추어 복싱 규칙은 프로 복싱에서 채택된 규칙과 크게 다르다. 프로 권투 경기는 4라운드에서 12라운드까지 계속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종종 2분간의 라운드가 마련되지만, 1라운드의 지속시간은 3분 정도 제한된다. 프로 복싱 대회는 15라운드까지 이어졌지만 1980년대 말까지 WBC, WBA, IBF는 12라운드 수를 제한한다는 공동 결정을 내렸다.
권투선수들은 보통 8~10온스(226 – 283g)의 무게가 나가는 패딩 장갑을 착용한다.
심판은 보통 링 중앙에 서서 싸움 규칙이 어떻게 지켜지는지를 관찰한다. 몇몇 규칙들은 심판 4명이 링 밖에 있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스코어링은 이들 중 3명만이 수행하는데, 이 심판은 각 권투선수들의 점수를 추정하고 승자와 관련한 결정을 내린다. 매 라운드마다 채점이 이루어지며, 우승자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2, 3명의 심판들이 권투 선수 중 한 명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그러한 승리는 보통 득점에 의한 승리라고 불린다
한 선수가 쓰러지고 10초 이내에 일어서서 경기를 계속할 수 없을 때, 즉 심판이 10초까지 카운트하고 카운트하기 시작할 때 녹아웃으로 경기가 종료될 수 있다. 그 싸움은 소위 기술적인 녹아웃에 의해 끝날 수도 있다. (그것은 싸움 목록에 승자는 TKO, 패자는 LTKO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심판이 선수들 중 한 명의 명백한 이점 때문에 경기를 중지할 때 발생한다. 권투 선수의 코치와 병 홀더들은 경기를 종료하기로 결정한다. 이 경우 흰색 수건을 들어 올린다, 권투 선수 중 한 명이 부상을 당해 경기를 계속할 수 없게 되거나, 트라우마가 권투 선수 중 한 명을 위협할 수 있는 경우. ife와 건강(의사가 심판 패널의 일원이 됨으로써 그러한 결정이 내려질 수 있다). 토너먼트 또한 추첨될 수 있다. 즉, 심판들은 경기를 위해 결정된 모든 라운드가 끝났을 때 어떤 권투 선수에게도 그들의 선호도를 주지 않았다. 이 경우 심판은 경합 금지 결정을 내린다. 즉, 토너먼트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싸움에는 NC로 표시되어 있다. 이 결정은 두 명의 권투 선수가 실격되거나 토너먼트에서 탈퇴할 때 내려질 수 있다.
다른 선수가 실격될 경우, 복싱 선수 중 한 명에게 승리가 주어질 수 있다. 실격은 권투선수 중 한 명이 규정 위반, 스포츠 장비 또는 권투선수 중 한 명의 체중이 규정된 체중 자격에 맞지 않아 발생할 수 있다. 경기 목록에는 우승자는 WDSQ로, 패자는 LDSQ로 표시될 수 있다.
권투 전술
권투선수들의 전술은 권투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다. 권투에서 효율적인 공격은 대개 상대의 머리와 몸에 강하고 쭉 뻗은 펀치를 만들어 내는 능력에 달려 있다.
방어 전술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상대 펀치를 견딜 수 있는 능력
링을 가로지르는 동안 상대의 펀치를 피할 수 있는 능력
능동적인 몸놀림, 즉, 상대편이 머리나 몸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회피 능력
다리의 움직임은 공격과 수비에 매우 중요하다.
권투에는 두 가지 주요 스탠딩 포지션이 있는데, 바로 오른손의 정통 스타일과 왼쪽의 사우스포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왼손과 왼다리를 앞세우고, 두 번째 스탠드업에서는 오른 다리와 오른손이 앞쪽에 위치한다. 대회 기간 내내 두 포지션을 모두 사용하는 이른바 스위치 히팅 복싱 선수도 있다.
공격한 손이 몸 앞에 늘어져 있는 어떤 위치에서도 다른 한 손은 턱밑에 들어가 방어한다. 턱은 젖가슴에 당기고, 어깨는 쭈뼛쭈뼛하다. 하지만 각각의 권투선수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권투에는 크게 네 가지 펀치가 사용된다.
잽 – 갑작스러운 펀치. 짧고 빠른 펀치는 주동자가 만든 정통과 왼손잡이 서열에서 모두 효과적이다. 펀치는 모든 손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훅 – 팔꿈치와 손목을 구부리고 안쪽으로 휘는 짧은 측면 펀치
어퍼컷 – 상대의 턱에 주먹이 전달되는 짧은 스윙 업 펀치.
스트레이트 – 어깨 높이에서 상대의 몸에 전달되는 스트레이트 펀치. 펀치는 보통 공격형 핸드 펀치 후 메인 핸드 펀치를 동반해서 원, 투로 공격.
다른 모든 펀치는 위의 펀치 4개의 변형이다.
스타일
과거 권투선수들이 맨주먹으로 대회를 정리할 때는 전달된 펀치의 위력에만 싸움이 집중됐다. 이런 스타일은 상대편 중 한 명이 싸움을 계속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이어졌다. 권투 선수의 손은 확실한 위치가 없었고, 다리의 움직임도 없었다. 득점 시스템과 함께 권투 글러브가 도입되고 권투 선수들이 득점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양손과 다리 움직임으로 구성된 권투 전술이 더욱 중요해졌다. 제임스 G. 코벳은 복싱 전술에 집중한 최초의 현대 헤비급 복서였다.
헤비급 챔피언 잭 뎀시는 공격적인 경기 전술과 녹아웃으로 경기를 끝내려는 그의 시도 때문에 관중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했다. 뎀프시는 낮은 스탠딩 포지션을 이용해 싸움을 진행했고, 진자로 계류하며 상대가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챔프 조 루이스는 결국 상대를 쓰러뜨릴 때까지 링을 가로질러 핍박하던 스토킹 스타일을 개선했다. 1980년대 말 슈퍼헤비급 마이크 타이슨은 복싱에서도 같은 전술을 사용해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무하마드 알리 이전에, 슈퍼 헤비급 선수들은 링을 가로질러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알리는 그가 당대 가장 빠른 헤비급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마치 매달린 손으로 상대를 감싸고 춤을 추듯 빠르게 수비와 공격을 위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충돌 펀치는 없었지만 강력한 펀치와 빠른 펀치 조합을 구사하며 많은 경기에서 승리했다.
각 권투 선수마다 스타일의 선택은 매우 개인적이지만, 빠른 움직임과 정확한 펀치가 현대 권투 전술의 두 가지 핵심 요소다.
복싱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알아봤습니다. 많이 도움되셨나요?
국내에도 뛰어난 복싱선수들이 많던데 우리나라 복싱도 세계에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하네요.

이상 복싱 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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